두 명이 번역을 해도 책/주워들은 이야기

전체 학부생들이 교양필수로 들어야 하는 글쓰기 강의(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글쓰기 등등)는 있어도 철학과 학부과정에서 에세이 쓰기 전공강의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다른 강의에서 에세이 제출을 과제로 내면 글쓰기 연습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교수들이 따로 강의를 개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철학과에서 요구하는 에세이 쓰기를 다루는 책은 시중에 별로 없다. 그나마 찾아보면 나오는게 A.P. 마티니치의 <철학적으로 글쓰기 입문>이다 

현재 시중에 나온 번역본은 3판인데 원서는 이미 4판이 나왔다.

https://www.amazon.com/Philosophical-Writing-Introduction-P-Martinich/dp/1119010039/ref=sr_1_1?s=books&ie=UTF8&qid=1534717666&sr=1-1&keywords=Philosophical+Writing%3A+An+Introduction

 

대학원연구실 책상 위에 한권 놓여있는걸 보고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 한권 구해 읽어 보았다. 2장에서 논리학에 대한 정보들이 어느 정도 나왔다. 대부분의 논리학 교재에서 가장 먼저 설명하는게 논증의 타당성이다. 논증은 명제들의 유한한 집합으로 그 중 하나의 명제가 결론이고 나머지 명제들은 전제에 해당한다. 타당한 논증은 전제들이 모두 참이면 결론 역시 반드시 참이 되는 논증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책에서는 타당성에 대한 정의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Df(3) 필연적으로 만약 모든 전제들이 참이고 결론이 참이라면 오직 그런 경우에만 논증이 타당하다.

위 번역본 p.40


문제가 되는건 '모든 전제들이 참이고 결론이 참'이라는 부분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 타당성의 조건보다 더 강한 조건이다. 타당성이란 전제들이 모두 참이면서 결론이 거짓인 경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논증이 타당하다고 해서 전제들 모두가 참인 것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 전제가 있는 타당한 논증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P1) 모든 동물은 식물이다.

P2)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식물이다. 


P1)은 거짓이지만 위 논증은 분명 타당하다. 혹시 원서가 잘못되서 저렇게 번역했나 싶어서 직접 원서를 찾아봤다.


Df(3) An argument is valid if and only if it is necessary that if all the premises are true, then the conclusion is true. 논증은 전제들이 모두 참이면, 결론도 참이 되는 것이 필연적일 때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타당하다.

Philosophical Writing: An Introduction, 3rd Edition, A. P. Martinich, Wiley-Blackwell 2009, p.20 


역시나 원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이게 더 정확한 정의다. 옮긴이 한명이 다른 옮긴이가 철학수업 중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해서(두 사람이 사제지간인 것으로 보인다) 대학 시절부터 번역을 간간이 했다는 소개가 무색하게 저런 실수가 나와버렸다.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수식이 나온 문장도 아닌데 말이다. 두 명이 달라 붙어서 번역을 했다면 서로 확인이라도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안했다는 말 아닌가? 교수들이 원서 읽어야 된다는 소리를 그냥 하는건 아닌거 같다.